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峨山 鄭周永

峨山의生涯

“…소학교 졸업이 내 학력의 전부이고, 평생 일만 쫓아다니느라 바빠서 사람들에게 가슴 깊이 새겨질 어떤 고귀한 철학도 터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나라를 책임질 젊은이들과 소년 소녀들에게 확고한 신념 위에 최선을 다한 노력만 보탠다면 성공의 기회는 누구나 공평하게 타고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싶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내가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나는 신념의 바탕 위에 최선을 다한 노력을 쏟아 부으며 이 ‘평등하게 주어진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한 사람일 뿐이다.”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중에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일궈낸 현대사의 큰 별 아산 정주영의 삶과 도전

아산 정주영 태어나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 현대(現代)를 창업해 한국의 경제 발전을 주도한 창조적 도전자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 아산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그리고 한국이 산업화와 국제화로 나아가는 주요 고비마다 큰 족적을 남기며 시대를 이끈 현대사의 큰 별이다. 1915년 11월 25일, 아산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훗날 아호가 되는 아산리(峨山里)는 속초에서 바다를 옆에 끼고 화진포, 고성을 지나 관동팔경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해금강 총석정 북쪽이다.

가난한 집안, 7남매의 장남이었던 아산의 부친은 동네에서도 소문난 일등 농사꾼이었다. 아산은 부친의 삶을 통해 성실과 근면이라는 가장 큰 자산을 일찍부터 체득했다. 모친 역시 일등 농사꾼의 일등 아내였다. 명주 짜기나 밭매기를 할 때 남보다 두 배는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아주 활동적인 분이었다. 어린 아산은 새벽 4시면 졸린 눈을 비비며 시오리 길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어려서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후 송전소학교를 졸업한 아산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부친은 그가 소학교를 졸업하자 대를 이을 일등 농사꾼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아산은 조상 전래의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했다. 항만과 제철공장 건설 노동자가 될 수 있겠다 싶어 가출을 했지만 이내 부친에게 이끌려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 두 번째, 세 번째 가출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가출에 실패하고는 부친의 염원대로 일등 농사꾼이 되어 동생과 가족을 건사하며 살아보겠다고 굳게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연이은 흉년은 다잡았던 마음을 돌려놓았다.

인천부두의 막 노동자에서 '경일상회'의 사장까지

19세가 되던 해 늦은 봄, 아산은 마지막 가출을 단행했다. 서울 가는 기차를 탔다. 가출의 종착지는 인천부두였다. 배에 물건을 싣고 내리는 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았다. 아산은 노동을 해도 서울이 낫겠다 싶었다. 서울로 향하다가 부천의 농가에서 품앗이 일꾼도 하고, (현 고려대학교) 신축공사장에서 돌과 목재를 나르는 막노동도 했다. 엿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산은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다가 서울의 쌀가게 ‘복흥상회의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복흥상회는 점심과 저녁을 먹여주고 월급으로 일년에 쌀 12가마니를 주는 안정된 직장이었다. 밤잠을 안자고 배달 자전거를 연습했다. 자전거 타는 기술뿐 아니라 쌀 가마니를 균형 있게 세워 싣는 자기만의 방법까지 연구했다. 겨우 몇 달 만에 아산은 최고의 배달꾼이 됐다. 모든 일에 전력을 다하면서 몸에 밴 성실함 덕분에 아산은 취직한 지 6개월 만에 장부정리를 맡을 정도로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얻었다. 1년 월급이 쌀 20가마니로 올랐을 때 아산은 드디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들의 갑작스런 출세에 부친은 깜짝 놀랐다.

아산의 변함없는 근면함과 성실함을 지켜본 주인은 쌀가게에서 일한 지 2년이 지났을 때 복흥상회를 인수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한다. 1938년 1월, 복흥상회의 단골들을 물려받은 24세의 아산은 ‘경일상회’를 설립한다. 아산은 부지런히 새 거래처를 개척해 나갔다. 쌀장사는 날로 번창했다. 아산은 경일상회를 우리나라 제일의 미곡상회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약 2년쯤 지난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는 쌀 배급제를 선포했고 전국의 쌀가게는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아산의 경일 상회도 마찬가지였다. 쌀장사를 그만 두고 아산은 그동안 번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 아버지께 논 2천 평을 사드렸고, 고향 면장의 장녀인 변중석과 결혼도 했다.

현대의 뿌리, 자동차 수리업

1940년 봄 서울로 다시 돌아온 아산은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을 찾는다. 그러던 중 한때 쌀가게의 단골손님이었던 자동차 기술자 이을학 씨의 권유로 아현동에 있던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했다. 첫 날부터 손님이 넘쳐났지만 그것도 잠시, 겨우 20일 후, 공장에 불이 났다. 건물만 태운 것이 아니라 수리 중이던 트럭 다섯 대와 올스모빌 승용차까지 몽땅 잿더미가 됐다. 잿더미는 빚더미를 의미했다. 다행히 평소 두터운 신용을 쌓아왔던 아산은 빚을 더 얻어 그 돈으로 동대문에서 다시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작했다. ‘아도서비스’는 신속하고 분명한 서비스로 승승장구 했다. 1943년에 비록 일본의 기업정리령에 의해 강제로 합병당했지만 아산은 자동차의 모든 기능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게 됐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아산이 여러 사업을 꿈꿀 수 있는 밑천이 됐다. 그리고 얼마 후,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서울시 중구 초동 106번지 부근. 미 군정청으로부터 불하 받은 2백 평 땅에서 아산은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으로 자동차 수리공장을 재개했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이후 ‘현대(現代)’라는 상호의 뿌리가 됐다. 현대를 지향하며 발전된 미래를 만들어보자는 의도였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차량 수리뿐 아니라, 1.5t 트럭의 중간을 이어 덧붙여 2.5t짜리로 만들어내거나, 휘발유 차를 목탄차로 개조하기도 했다. 전국의 내로라 하는 기술자들이 현대자동차공업사로 몰려왔다. 덕분에 30명이었던 직원이 1년 만에 80명까지 늘어났다.

현대건설, 현대 신화의 시작

어떤 일을 하든 ‘반드시 된다’는 확신을 가졌던 아산은 1년 후인 1947년 5월,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 옆에 ‘현대토건사’ 의 간판을 덧붙였다. 1950년 1월, 아산은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건설업에 진출한다. 그러나 반년 후 6ㆍ25동란이 터졌다. 하지만 아산은 전쟁의 시련 속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미군 전시긴급 공사에 뛰어 들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의 한겨울,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유엔군 묘지를 방문했을 때 파란 잔디로 덮여있어야 한다는 미군의 요구에 아산은 새파랗게 자란 보리를 옮겨 심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서울이 탈환되자 미군의 발주 공사는 현대건설이 거의 도맡아 할 수 있게 됐다.하지만 아산은 전쟁의 시련 속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미군 전시긴급 공사에 뛰어 들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의 한겨울,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유엔군 묘지를 방문했을 때 파란 잔디로 덮여있어야 한다는 미군의 요구에 아산은 새파랗게 자란 보리를 옮겨 심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서울이 탈환되자 미군의 발주 공사는 현대건설이 거의 도맡아 할 수 있게 됐다.

아산은 이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내 사회간접시설을 재건하는 전후 복구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휴전 후 도로•항만•교량 등 다양한 토목건축공사를 수행하며 현대건설은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당시는 전문인력과 장비가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고 고령교 복구공사 등 일부 공사는 극심한 인플레로 큰 손해를 입었으나 이를 감수하고 끝내 완공시켜 신용을 인정받는다. 이후 현대건설은 1957년 단일 공사로는 전후 최대 공사인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를 수주하는 등 건설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국가와 산업의 기초를 건설

아산이 세계적인 현대를 만든 원동력은 6•25전쟁 와중에 생겨난 철학이 바탕이 됐다. 바로 ‘현대는 나라와 더불어 발전하는 회사’라는 인식이다.

1960년대, 전쟁의 상흔을 딛고 경제개발과 산업화를 위한 대규모 사업들이 활발히 시작됐다.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국가 기간시설의 건설이었다. 이미 남보다 앞선 기술력으로 한강 인도교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현대건설에게 기회가 왔다. 현대건설은 호남비료 공장을 시작으로 한국비료, 충주비료 공장을 건설했으며 삼척•영월•군산•인천•평택의 화력발전소를 지으며 기술력을 쌓아갔다. 화력발전소의 성공적인 시공은 수력발전소인 춘천댐과 다목적댐인 소양강댐 건설로 이어졌다. 특히 부족한 시멘트와 철근을 대체하기 위해 콘크리트댐이 아닌, 자갈과 모래를 이용한 사력(砂礫) 댐을 고안해 소양강 댐을 완성시킨 아산의 창조적 사고는 우리나라 대안 건설의 효시로 손꼽힌다.

아산이 주도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건국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였다. 국토의 대동맥을 잇는 대역사로 공사 기간은 당초 3년이었다. 당시 기술 수준과 장비로 이 기간 내 4백28km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모험이고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아산은 이때 기계화를 통한 공기 단축이 성공의 열쇠라고 판단하고 당시 국내 경제 상황에서는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는 8백만 달러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총 중장비가 1천4백 대 정도였는데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들여온 중장비가 1천9백 대였다. 1970년 7월 7일, 428km에 이르는 경부고속도로는 착공한지 2년 5개월 만에 개통된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길’로 회자되고 있다.

이후 아산은 국가 기간시설 건설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중공업, 기계공업의 경쟁력 강화에도 나섰다. 아산의 노력은 농업과 경공업 등 1차 산업 일색이던 국가 산업의 구조를 확대,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었고 결국 대한민국의 현대화와 경제발전 견인차가 됐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연 개척자

한국 경제가 자립국가를 목표로 수출에 눈을 돌릴 때 아산은 국내에서 쌓아 올린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 건설시장 개척에 나섰다. 그중 첫 번째 해외진출인 1965년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는 우리나라 건설업 사상 가장 획기적인 전기로 받아들여진다. 당시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해외시장 개척은 새로운 돌파구였다. 하지만 기술•자본•장비 등 모든 면에서 선진국에 뒤쳐져 있어 어느 기업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서독, 이탈리아, 덴마크 건설업자들이 이미 진출해 있던 태국 현장에, 우리나라의 현대건설이 투입한 장비는 대부분 국내 도로 공사에 사용했던 재래식이었다. 최신 장비를 구입해 봐도 사용 방법을 모르는 기능공들이 한두 달도 못 되어 고장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산은 갖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진동식 롤러, 컴프레서, 믹서를 직접 만들어 썼고 시멘트 싣는 차도 만들어 썼다. 비록 초보적인 장비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현대가 해외건설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게 한 출발점이 됐다. 이후 아산은 베트남의 준설공사, 알래스카 협곡의 교량공사, 호주의 항만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향후 1970년대 중동 붐을 타고 오일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1976년 수주한 9억4천만 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20세기 최대의 역사(役事)’로 일컬어진다. 수주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수 많은 에피소드를 만든 대 공사였다. 이 공사에 투입된 2백50만 명의 연인원과 장비, 자재는 2차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 규모였다. 아산은 울산에서 제작한 철골 구조물을 배로 중동 현장까지 수송하는 과감하고 창의적인 발상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액은 그 해 우리나라 국가예산의 절반에 해당될 만큼 건국 이래 역사상 가장 많은 외화 획득이었으며, 우리나라 산업 전반에 중동 붐을 일으키고 해외 진출에 자신감을 불어넣은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불굴의 기업가정신과 사업보국주의

아산은 전쟁 후 황무지나 다름 없었던 한국 산업사회에서 늘 새로운 분야를 직접 개척했다. 국가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는 도로•교량•댐•발전소•항만 등 기간시설의 건설에 주력하면서도 해외 건설시장을 개척했고, 중공업과 기계공업을 일으켜 수출 산업화의 길을 열었다.

아산은 생전에 산업을 ‘나라를 부(富)하게 만드는 산업’과 ‘강(强)하게 만드는 산업’으로 나누어 생각했다. 한국의 산업이 부만을 창출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미래에 나라를 강하게 만들 조선•자동차•중공업•철강 등을 집중 육성해 산업의 고도화를 이끌었다.

‘세계 1위 조선 강국’ 신화의 기반을 만든 것 역시 아산이었다. 1960년대 말, 당시 한국의 최대 선박 건조능력은 10만 3백 톤, 최대 건조실적은 미국에서 수주한 1만 7천 톤짜리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산은 수십만 톤 규모의 조선소를 건립한다는 당시로서는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나섰다. 조선업 진출은 우리나라 경제 구조를 경공업에서 중공업 쪽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아산의 결단이었다. 조선업은 위험 부담은 크지만 많은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업종이었기 때문이다.

1971년, 아산은 조선소 사업계획서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1장만을 들고 영국으로 차관을 얻기 위해 떠났다. 아산은 여기서 500원 지폐에 그려져 있는 거북선으로 우리 조선 기술의 역사와 우수성을 설명하며 1억 달러의 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했고, 조선소도 없이 선박의 발주처를 찾는 모험을 강행해 그리스의 세계적인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 리바노스로부터 26만 톤 급 유조선 두 척을 수주해 냈다. 아산은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동시에 진행하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창의력을 발휘하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울산의 현대조선소는 도크를 파내는 것도 그렇고 배를 만드는 것도 그렇고 모두 세계 기록을 세웠다. 2년 만에 조선소 완공과 동시에 26만 톤 급 유조선 2척을 건조하는 세계 조선사상 유례가 없는 신화를 이룩했다. 아산의 긍정적인 사고와 신념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다.

한국 자동차 신화의 서막을 열다

아산이 처음 시작한 사업, 그리고 일생을 걸 사업으로 생각한 것 중의 하나가 ‘자동차’였다. 아산은 자동차 산업이 미래 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내다봤다.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國旗)이며 그 나라 산업의 척도’라고 생각한 아산은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자동차 산업에 본격 진출한다. 현대자동차는 초기 미국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생산 협약을 맺고 합작회사 형태로 승용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자동차로 세계 시장 진출을 꿈꿨던 아산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해외 선진업체의 하청기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100% 우리 노력으로 국산 고유 모델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단을 내린다. 그런 아산의 집념으로 1975년 12월, 국산 고유 모델 1호 포니(PONY)가 탄생했다. 이 시기를 놓쳤다면 아마 현재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 수준은 외국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제2차 오일쇼크로 전 세계가 불황에 빠진 1980년대 초에는 이러한 위기를 독자기술 기술개발을 통해 돌파하기로 결심하고 이른 바 ‘X카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우리 손으로 전륜 구동 고유모델을 개발, 자동차 산업의 본고장인 북미 시장에 본격 진출하겠다는 의도였다. 마침내 1985년 선보인 국내 최초의 전륜 구동 승용차 ‘포니 엑셀’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한국을 본격적인 자동차 수출국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1983년에는 자동차의 심장인 엔진 개발을 결심하고 ‘신엔진 개발 계획’을 세웠다. 연구소를 설립해 국내외 인재를 모으고 해외로 기술 연수를 보냈다. 그리고 2년 만에 ‘알파엔진’ 시제품을 완성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기술자립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아산이 뿌린 씨앗은 우리나라가 세계 자동차 강국으로 도약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 현대자동차는 다양한 고유 모델을 계속 개발하며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질주해 나가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기아자동차를 인수해 한국 자동차 산업의 고도화와 동반 성장을 도모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이후 전 세계로 생산법인을 넓혀 나가며 현재 전 세계에 700만 대 이상의 자동차를 판매하는 세계 5위권의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로 도약했다.

이웃과 나라를 위하여

아산은 생전에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했다. "기업의 규모가 작을 때는 개인의 것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종업원 공동의 것이요, 나아가 국가와 사회의 것"이라는 것이 아산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철학과 신념으로 1977년, 아산은 보유하고 있던 현대건설의 개인 주식 50%을 출연해 공익재단인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아산은 당시 "현대건설의 성장 과정에 기여한 근로자들의 노고를 나는 잊지 않는다. 엄동 설한에도, 열사의 중동에서도 그 힘든 공사를 최선을 다해 해냈던 우리 근로자들의 땀과 정성이 없었다면 눈부신 성장도 없었을 것이다. 현대건설의 사회 환원은 그런 외롭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돌리고 싶었다"고 재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이러한 아산의 뜻에 따라 설립된 아산사회복지재단은 ‘우리 사회의 가장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 는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사회공헌 철학 위에 첫째-소외된 이웃을 돕겠다는 순수한 인도주의 정신, 둘째-기업의 사회적 책임 수행, 셋째-한국 사회의 불균형 발전 극복을 설립 이념으로 정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설립 초부터 현대적 의료시설이 열악한 농어촌지역을 비롯한 전국에 8개의 대규모 종합병원을 건립해 양질의 의료혜택을 제공해 오고 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적정한 진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무료진료 사업을 펼쳐오고 있으며 노인•아동•장애인 등 각종 사회복지단체 지원, 학술연구 지원사업, 장학사업 등 아산의 유지에 따른 다양한 사회공헌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아산은 또한 1977년 기업인들의 만장일치 추대를 통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이후, 10 년간 5차례 회장직을 연임하며 재계의 수장으로서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특히 1978년, 오일쇼크 이후 세계 경제질서가 무역장벽의 강화, 국제 경제권의 다극화 등으로 재편 조짐이 보일 때, 한국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정부주도의 경제에서 민간주도의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해 198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우리 경제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성장, 발전 했을 뿐 아니라, 정부주도 체제에서 민간이 주도하는 건강한 자유 경쟁체제로 변화했다.

아산이 올림픽 유치에 나선 것 역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우리나라는 1981년 2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제24회 하계올림픽 유치신청을 했다. 누구도 실제로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1981년 5월, 그런 상황에서 아산은 서울올림픽 민간추진위원장을 맡게 된다. 올림픽 개최지 결정이 반년도 채 남지 안은 시기였다. 이미 일본 나고야가 승기를 굳힌 상황이었지만 주어진 일을 꼭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 아산의 생각이었다. 아산은 ‘현대식’으로 불도저처럼 올림픽 유치전을 전개했다. 먼저 기존에 있는 시설들을 최대한 활용하며 흑자 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 계획을 수립했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현대를 포함한 각 기업들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총 동원했다.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선 못할 일, 못 만날 사람이 없었다. 이미 일본을 지지한다고 공언한 선진국의 대표단은 물론 아프리카와 남미 등 제3세계 대표들, 북한을 포함한 공산국가의 대표까지 의결권을 가진 전세계 82명의 IOC의원들을 한 명 한 명 설득해 나갔다. 그리고 결국, 아산의 도전은 올림픽 개최도시 선정을 위한 IOC 총회가 열린 독일의 바덴바덴(Baden-baden)에서 기적이 됐다. 1981년 9월 20일, 서울 52표 나고야 27표.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도시를 선언했다. "쎄울. 꼬레아."

88서울 올림픽은 세계 159개국 1만 30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했으며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던 동서양 진영이 16년 만에 함께하며 이념과 인종차별의 벽을 뛰어넘은 화합의 장이 됐다. 한국인의 저력을 세계인들에게 확고히 각인시켰다. 3천5백억 원 이상의 흑자까지 기록한 성공적인 올림픽이었다.

아산은 국토를 넓히는 대규모 간척사업에도 착수했다. 바다를 매워 옥토를 만든 서산 간척지 사업은 국토의 서쪽 지도를 바꾼 대역사였다. 조수의 차가 심해 바다 속에 최소 20만 톤 이상의 암벽을 매립해야만 물막이가 가능한 쉽지 않은 공사였다. 아산은 암벽을 확보할 수 없어 공사에 난항을 겪자 고철로 팔기 위해 구입했던 스웨덴의 20만 톤 급 유조선을 가라앉혀 파도를 막은 후, 그 위를 메워 둑을 완성시키는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정주영 공법’이라고 회자되는 이 공사 방법으로 공사비는 예상보다 290억 원이나 절감됐고, 여의도의 48배나 되는 무려 1억 404만 7410㎡의 국토가 새로 생겼다.

정치 참여와 남북 교류 사업

아산은 생전에 "정치와 경제가 함께 손잡고 국가를 발전시켜야 하며 미래의 국가는 통치가 아니라 경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2년, 아산이 정치 참여를 결심한 것 역시 그러한 철학이 바탕이 됐다. 통일을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 모두 건강해야 하는데 1990년 들어와서 국제 수지가 적자로 돌아섰고 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경제가 그 지경인데도 여당은 3당 합당을 통해 정권유지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아산은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경영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통일국민당은 창당 3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31석을 차지했고, 아산은 그 해 12월 통일국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국민들로부터 16.3%의 득표를 얻는다.

1998년 6월 아산은 전 세계의 관심 속에 통일소 500마리를 이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트기 위해 아산이 북한을 첫 방문한 지 10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 아산의 나이 85세였다. 소떼 방북은 남북 대결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을 화해와 평화의 장소로 바꿔 놓은 빅 이벤트였다.

그 해 10월, 황소 501마리와 함께 다시 판문점을 넘은 2차 방북 때는 우리나라의 민간 기업인으로서는 최초로 고 김정일 위원장과 만난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금강산 관광선 금강호가 동해항을 떠나 북한으로 출항했다. 이듬해 2월, 금강산으로 가는 육로가 열렸다. 아산이 추진한 대북 교류사업은 분단 이후 반 세기 동안 진행되어 온 남북사업의 전체보다 양과 질에서 압도적이었으며, 민족의 화해와 평화 협력에 기여하며 향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초석이 됐다.

위대한 긍정주의자, 아산 정주영

아산은 생전에 "세상을 밝게 맑게 바르게 보고, 이 사회에 보탬이 될 목적으로 산다면 할 일은 태산처럼 많다"고 늘 강조했다. 희망의 철학을 철저히 신봉한 ‘위대한 긍정주의자’ 아산은 평생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대한민국의 산업과 평화의 큰 기틀을 다져 부강한 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고, 맹렬한 실천력으로 인간의 무한한 창의가 이루어 낼 수 있는 거대한 집념의 실체를 몸소 증명했다. ‘모든 것의 주체(主體)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아산은 누구보다 이웃을 사랑한 진정한 인본주의자였고, 실체적 인 경험을 지식보다 중시했던 위대한 학식가였으며, 평생 동안 성실과 근검의 철학을 생활 속에서 철저히 실천한 ‘부유한 노동자’였다.

2001년 3월 21일. 아산은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살았던 서울 청운동 자택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조문객의 면면은 계층을 초월했고 남북 분단의 벽을 넘었으며 국경이 따로 없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생각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현대사의 큰 별 아산 정주영은 향년 86세로 영면에 들었다. 아산은 떠났지만 그의 꿈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아산이 걸어온 강의예지(鋼毅叡智)한 삶의 모습은 모두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