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을 기다리며

정주영

이 글은 아산 정주영이 1981년 한 일간지에 직접 기고한 글로 기업인으로서의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창밖으로 내리는 부드러운 함박눈은 오는 봄을 시새는 것인가. 예로부터 立春(입춘) 지나서 오는 눈은 꽃을 시샘하여 내린다 하여 꽃샘눈이라고 부른다. 초봄의 女神(여신)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마음속에 흐뭇하게 안겨준다. 仁王山(인왕산) 골짜기엔 解氷(해빙)의 물소리가 졸졸 흐르며 삼라만상을 에워싼 대기에는 약동하는 새봄의 기운이 서렸음을 알려준다. 춥고 지루하던 겨울은 지나가고 깊고 깊은 겨울밤의 思索(사색)에서 깨어나 긴 기지개를 켜는 봄을 바라본다.

이른 봄 먼 곳에서 동경의 女人(여인)이 살며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새봄을 기다리며 仁王山(인왕산) 음지의 殘雪(잔설)에 아쉬움을 보낸다. 早春(조춘)의 아침은 상쾌하다. 차갑고 부드러운 바람이 뜰안에 가득하고 裸木(나목)을 한 둘레 돌아와서 나의 옷깃을 파고든다. 며칠 사이 확실히 달라진 것이 많다. 

2월의 이른 봄은 봄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대답하면서 찾아왔다. 봄을 기다린 사람은 많다. 그중에서도 산간농촌 殘雪(잔설) 사이 양지쪽 논두렁에 불을 피워놓고 구정 대보름달을 맞이하는 思春期(사춘기)의 아이들 마음속에 봄은 맨 먼저 찾아온다. 도시의 운동부족인 일과를 다소라도 메우려고 새벽 출근길에 반은 걷고 반은 뛰어가는 사이에도 천지간에 새봄이 찾아들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눈을 밟으며 뛰어가는 운동화 바닥으로 봄을 느낀다. 밟히는 촉감부터 다르다. 봄눈의 감촉은 부드럽고 연하며 겨울눈은 이보다 딱딱하다. 달려가는 새벽길의 겨드랑이 속으로 스며드는 봄기운은 생명 속의 오염된 찌꺼기를 씻어내는 맑은 냉수와도 같다. 새벽녘 景福宮(경복궁)의 중후하고 긴 돌담장 옆을 달리며 아직은 찬 침묵 속이지만 봄의 태동을 곳곳에서 느낀다. 早春(조춘)의 감격을 가슴 그득히 들이마시며 아직 밝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서면 봄은 간곳없이 사라진다. 비단 봄뿐이 아니고 모든 節氣(절기)의 변화에 대하여 그 反射感覺(반사감각)은 무디어지고 어린 시절의 먼 감상을 되씹는 일밖에 없다. 계절이나 자연은 그때에만 민감할 수 있고 有情(유정)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린 날의 순박한 자연은 어느새 멀리 뇌리에서 사라져버리고 고향을 등진 도시의 流浪民(유랑민)처럼 거북한 긴장 속에서만 살아왔던 일을 되돌아본다. 이러한 세월이 제2의 天性(천성)으로 화하여 다년간의 생활감정도 이런 습관에 이어져서 바람직하지 못한 개별의 나를 형성해 놓았다.

오늘의 현실은 4·4 分期制(분기제)의 소득확대 추구를 위한 치열한 적자생존 투쟁으로 채워지는 4계절뿐이다. 기업인에게는 歡喜(환희)의 4계절이나 낭만적 4계절은 연분에 닿지 않고 대자연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心情(심정)에 다가서지 않아 멀고 먼 데에 있는 것과 같은 실정이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젊은 계절에 궁핍에서 헤어나기 위하여, 굶주림과 헐벗음을 딛고 일어서기 위하여, 그리고 구멍가게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기업인으로서 불안한 첫발을 내디딜 때, 또한 그 일을 기점으로 하여 내 생애의 발목이 잡힌 후 오늘까지 모험과 투쟁 속을 헤쳐 나왔다. 나로서 최선을 다하는 그 渾身(혼신)의 집중과 정열과 全心全靈(전심전령)을 消盡(소진)하는 질주의 기나긴 행로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편이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지는 아니한다. 企業(기업)의 대열에 서 있는 여러 기업 동지들이 이와 같은 형편에 놓여있을 것이다. 남이 잘 때 깨고 남이 쉴 때 뛰어가지 않으면 기업의 육성은 불가능하다. 처절하다고 할 만큼 각박한 競合事例(경합사례)들을 수없이 치러내면서 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봄이 와도 봄의 줄 밖에 서서 昏迷(혼미)한 어둠에 몸을 적시고 있는 수가 많다. 경쟁에 이기는 것만이 삶의 전부로 생각해온 폐쇄적 열기에 갇혀 지내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봄은 환상 속에만 있는 관용의 女人(여인)과 같다.

봄은 만인이 듣는 복음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봄은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온다. 춥고 음침한 긴 겨울을 힘겹게 견디어낸 사람들에게 봄은 더욱 따스하다. 살며시 스며드는 봄은 慈愛(자애)의 어머니같은 성품 그대로이다. 포근하고 훈훈하다.

언제나 긴장하고 서두르면서 마음의 안식이라곤 없는 기업인들은 하늘의 별을 딸 듯한 기세로 달려가지만 정치가나 공직자 또한 聖職者(성직자)들의 비판 앞에서는 자라목같이 움츠러들기를 잘한다. 그 허약한 기업 군상들. 유구한 儒敎(유교)의 사상이 그러했고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선조들이 실정이 그러했거니와 제 아무리 천만금을 손에 잡은 사람이라도 봄바람에 녹은 殘雪(잔설)과 같은 인간적 허약의 일면을 숨길 수 없다. 기업의 사무실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화려한 循環(순환)도 속절없이 스쳐 지나가며 다시 새봄이 와도 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때가 많았다.

[空地(공지)에 無花草(무화초)하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이다]

기업인들이 봄을 기다리는 건 하늘에 별을 붙이고 돌아오는 여인을 기다리는 바나 다름없이 空疎(공소)한 경우가 되곤 했다. 그런데 봄이 또 왔다. 仁王山(인왕산)의 잔설을 밟으며 계절의 은혜를 새삼 되뇌인다. 봄볕이 하루하루 짙어져 간다. 天地(천지)가 새봄이다.

이제부터 기업의 壇下(단하)에서 봄을 만끽하고 싶다. 經濟壇上(경제단상)에서 호기 있게 일하는 연출자들의 화려한 무대를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心情(심정)의 여유를 가지고 이 봄을 즐기리라. 봄눈이 녹은 들길과 산길을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서 위대한 자연을 재음미하고 인정의 모닥불을 피우리라. 天地(천지)의 창조주 앞에 경건한 찬미를 바치리라.

인생은 여러 가지이다. 온화한 삶과 질풍처럼 달리는 삶이 있으나 窮極(궁극)의 염원은 한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平和(평화)와 自足(자족)을 느끼는 마음이다.

봄이 온다.
마음 깊이 기다려지는 봄이 아주 가까이까지 왔다.